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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 maria -안녕 마리아



안젤리코 ( Fra Angelico : 1400? ~ 1455.2.18 )
이탈리아의 화가. 도미니크수도회 수도사. 본명은 Guido di Pietro. Giovanni da Fiesole라고도 함. 피렌체 근교 비쿄 출생. 일생을 경건한 그리스도 신앙의 표현에 헌신하였다고 하여 ‘베아토 프라 안젤리코(축복받은 天使修道士)’로 불렸다. 20세 때 피에솔레의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얼마 후 종문분규(宗門紛糾)로 코르토나수도원으로 옮겨 10년 가량 코르토나와 포리뇨, 그리고 피에솔레 등지에서 지낸 다음, 1436년 피렌체의 산마르코수도원으로 옮겼다.

초기의 르네상스의 피렌체 양식을 따라 평온한 종교적 자세를 구체화하고 고전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대부분의 초기 작품은 피렌체에 사는 동안 산마르코 수도원에 그린 벽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로마에서 안젤리코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예배당(1446경~47)과 바티칸 궁전의 성사 예배당(1447 이후) 및 교황 니콜라우스 5세의 방(1449)에 그린 프레스코들은 모두 파손되었다. 그러나 바티칸 궁전에는 그가 니콜라우스 5세 예배당을 위해 그린 장식화가 아직 남아 있다. 여기에는 4복음서 저자들과 성인들의 인물화 및 성 스테파누스와 성 로렌티우스의 생애에서 따온 장면들이 묘사되었고, 산마르코 수도원의 제단화에 들어 있는 프레델라의 일부가 반복되었다.

성 스테파누스와 성 로렌티우스의 봉헌 장면을 그린 그림들은 둘 다 장엄한 대성당 내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성 로렌티우스의 시혜 장면은 신전을 배경으로 걸려 있다. 특히 이 장면에서 평온한 모습으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고 그들을 계몽하고 있는 부제의 성인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적인 빛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들을 제단화들에 나오는 축복받는 인물들과 동등하게 묘사했다. 동시에 이 작품들의 구성과 건축물의 묘사는 그가 르네상스 밀술가 로서 절정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안젤리코는 그의 제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특히 피렌체에서 1440~50년에 프라 필리포 리피와 같은 기성 대가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수사로서 15세기 이후의 여러 저술에서 칭송을 받았으며, 그중 일부는 그를 전설적인 인물로 기록했다.

초창기의 그림은 로렌초 모나코의 고딕풍에서 출발하여, 성서의 삽화와 템페라의 판 그림에 빛나는 듯한 색채와 꼼꼼한 세부묘사를 보였다. 그 후 도나텔로와 마사초 등의 영향으로 양체표현(量體表現)과 원근법을 터득하고, 33년의 《리나이누올리의 성모(聖母)》(산마르코수도원)와 35년경의 《그리스도 강탄(降誕)》(산마르코수도원)에서는, 자연의 직접적인 관조에서 비롯된 듯한 풍경묘사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산마르코수도원의 일련의 벽화에서는 프레스코화법을 채택, 그 제약과 특성을 충분히 살리면서 주제의 본질을 파악한 단순화와 입체적 구도에 조형적인 인물상을 보여주었다. 45년, 교황의 소명(召命)으로 로마로 가, 바티칸궁 니콜라우스 5세 예배당에서 그린 여러 벽화는 로마 고대건축의 장대함을 보여주는 스케일이 큰 작품이다. 이 밖에 《수태고지》 《별의 성모》 《최후의 심판》 《수태고지와 동방박사들의 경배》 등의 작품들이 전한다.

화가로서 그는 일찍이 1438년에 당대의 화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에게 찬사를 받았다. 바사리는 그의 저서 <미술가 열저 ㄴLives of the Most Eminent Italian Painters, Sculptors and Architects>에서 안젤리코의 일대기를 약간 틀리게 기록했지만 그를 르네상스기의 미술가로 규정한 점에서는 옳았다. 안젤리코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18세기말에 신고전주의 저술가들이 철학적.교훈적 관점에서, 그를 시대의 뒤떨어지는 미술가로 평가해 과도기 미술가로 단정할 때까지 바사리의 평가가 안젤리코의 예술을 재는 척도가 되었다. 그러나 대개 현대 미술 비평가들은 그를 다시 르네상스기의 미술가로 평가하고 있다. 안젤리코는 고전적인 양식으로 깊은 종교적 자세를 표현했다.

생애를 마칠 무렵인 1450년경 역시 피렌체에 있는 산안눈치아타 교회의 지성소에 비치된 은궤의 문들에 35점으로 이루어진 일군의 그림을 그렸다


스승이였던 조토와는 달리 수도사로 경건한 삶을 살았던 안젤리코는 인물의 내면을 그려낼줄 알았다.
그는 자신을 또 하나의 성 프란체스코,다시 말해서 붓과 캠버스와 물감 통을 든 프란체스코로 단련하여 그것을 해냈다.
교회는 그에게 '프라'라는 성스러운 명예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선언하고,화가로써는 유일하게 성자들의 대기실에 들어올수있도록 허락했다.여하튼 이 성실한 수도사의 작품을 보고 연구할때 생생한 현실성-이는 사실의 현실성이 아니라 상상의 현실성이다.그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어도 구체적이고 생생한 인물이 된 원탁의 기사가 갖는 '현실성'과 같은것이다.
그는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도미니스쿠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다.
보통의 다른 신인들과 달리 그는 인정받기 위해 오래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다.그의 작품은 처음 부터 칭찬 받았으며 그는 거의
반세기 동안 즐겁게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다니며 제단 장식 그림을 비롯하여 그밖에 부탁 받은 그림을 그렸다.그러면서 온
힘을 다해 신의  더 큰영광을 위해서 봉헌했다는 확신 이외에는 아무런 보수도 요구하지 않았다.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에는 색채가 있고 아주 풍부하게 쓰였다.당시 유행하던 스테인드 글라스의 화려하고 어린이들이 무지개로 마음것 재주를 부린듯한 화려함과는 배치되는 세련됨이다.
이 거장의 그림을 보면 안젤리코는 잊기 쉬운 사실, 즉 하나님은 정말 신사이며 따라서 천국에는 온화한 성품과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깨 닫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